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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지아 친일파 후손 논란, 이지아 조부 친일파 김순흥 그는 누구인가?

by 그로우업82 2025.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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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흥(金淳興, 1910년 12월 28일 ~ 1981년 10월 26일)은 일제 강점기 조선 대한민국 친일파이다. 본관은 광산으로 손녀는 배우 이지아다. 창씨개명 당시 이름은 金本淳興이다. 이지아의 조부가 친일파였다는 사실은 그녀의 개인적인 활동과는 별개로 가족의 역사에서 발생한 일로, 이지아 본인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1. 김순흥의 생애

경성부 출신으로 경성에 거주하는 대지주로서 경기도 파주 지역에  389정보와  75정보를 소유했으며, 1937년 6월말 경 소작인 750여 명을 두고 있었다. 1940년 경 1년 소득이 11만 원이었다.

 

2. 일제 강점기 당시 김순흥의 친일 활동

김순흥은 일본 제국주의를 위해 국방 관련 단체에 헌금을 기부했다고 합니다. 그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내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1만원은 현재 가치고 10억원 상당이 된다고 합니다.

  • 1933년 8월 조선 나 예방 협회 기금으로 1000원을 냈다.
  • 1934년 6월 29일 조선중앙일보 감사 역을 맡았다. (사장 여운형)
  • 1936년 2월부터 합자 회사 구정 상회 사장으로 있었다. 이때 교하간이교(校河簡易校)를 지을 땅을 1,500평을 기부하였다.
  • 1936년 7월부터 금융 신탁 회사인 우익 상사 취체역[4]으로 있었다.
  • 1937년 7월 22일 국방 헌금 1만원을 종로경찰서에 헌납했다. 그는 "나라에 대한 봉사의 뜻을 표하고자 적은 돈이나 마 바치오니 받아주십시오"하고 돌아갔다.[5] (내자정 162-2 김순흥, 내자정은 이후 내자동)
  • 1937년 조선 군사 후원 연맹 사업비로 2500원을 냈으며, 같은 해 9월 5일 결성된 '경기도 내 군기 헌납 기성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비행기 대금 500원을 냈다.(당시 군용기 1대 75,000원), 반일 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일선융화'를 내걸고 결성된 동민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가 전시 체제 강화와 유도 황민화를 위해 전 조선 유림을 동원하여 조직한 조선 유도 연합 회에서 참사를 맡았다.
  • 1939년 9월 주식회사 쇼와 직물을 설립하여 사장을 역임.
  • 1940년 9월 중앙 연료 주식회사 취체역을 맡았다.
  • 1943년 8월 징병제 실시에 감격하여 국방 헌금 3000원을 헌납했다.
  • 1944년 4월 일본 정부가 주는 감수 포장을 받았다.
  • 참조 : 위키백과

 

 

 

3. 해방 이후 삶과 사망

해방 이후,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발기인을 참여했고, 1945년 12월 대한경제보국회 감사를 맡았습니다. 1948년 김구와 임시정부 계열이 지목한 숙청 대상 친일 인사들 명단 초안에도 이름이 올랐습니다.

1981년 10월 26일 사망하였습니다. 동아일보 1981년 10월 28일자에는 "학교법인 이화학원(현 이화여자대학교) 이사 김순흥씨가 새벽 4시 50분 서울 종로구 내자동 167-2의 자택에서 별세했다. 장례는 서울예고에서 이화학원장으로 거행된다고 밝혔다." 이 주소는 1937년 7월 22일 일제 강점기 종로 경찰서에 국방 헌금 1만원을 헌납했던 주소와 이름이 일치한다고 합니다. 1948년 김승학의 친일파 명단, 2009년 친일인명사전 경제 부분에 선정되었습니다.

 


4. 결론

김순흥은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 제국에 친일 활동을 하며 일본의 군국주의 정책에 협력한 친일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일본의 침략적인 활동을 지원하였고, 한국 지배를 강화하려는 일본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습니다. 해방 후 그의 친일 행위는 큰 논란을 일으켰으며, 지금도 그의 이름은 한국 역사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친일파 인물에 대한 논의는 한국 사회에서 역사적 정의와 청산을 요구하는 중요한 문제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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